LIFE/TRAVEL

르네상스의 본고장 피렌체

자연데생 너구리 2025. 3. 10. 00:38

8월 6일

 나폴리 숙소에서 준비해 둔 아침식사(빵 같은 것들)에 개미가 꼬여서 별로 먹지 못했다. 전날 나폴리 중앙역에서 걸어오는 게 살짝 힘들었음을 고려해 이번에는 우버를 잡아 이동했다.

 이딸로를 타고 멋진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몇 시간 후 피렌체역(Firenze Santa Maria Novella)에 도착해 있었다.

피렌체(Firenze)

 피렌체는 토스카나주의 중심 도시다. 피렌체와 그 주변(토스카나) 지역은 중세에는 신성 로마 제국 아래에 들어가 있었는데 12세기부터는 사실상 독립하여 피렌체 공화국이 되었고, 15세기에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잡으며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더보기 : 르네상스와 피렌체

 르네상스는 15~16세기 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문화적 움직임, 또는 그 시대를 뜻한다. 흔히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전환점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앙에 속박된 중세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고전(그리스, 로마) 시대 문화예술과 같은 '인간 중심으로의' 복귀를 추구하였다. 르네상스라는 명칭은 프랑스어이며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시멘토(Rinascimento)라고 하는데 '재생', '부활'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시대 작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천지창조>, 1512.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르네상스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 흑사병, 이탈리아 특유의 사회·정치적 분위기와 활발한 무역 활동 등 복합적 원인들이 겹치며 이탈리아 반도, 특히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을 지배하던 가문인 메디치(Medici) 가문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을 후원하였기에 가능했다.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며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단테부터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 브루넬레스키, <군주론>의 마키아벨리, 지동설의 갈릴레이가 모두 피렌체 공화국 출신 인물들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텔로, 보티첼리, 티치아노 등 수많은 예술가들도 피렌체 출신이거나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피렌체식 스테이크와 트러플 리조또

 피렌체의 명물인 스테이크(bistecca alla firoentina)부터 먹으러 갔다. 피렌체는 가죽 공예로 유명한 지역인데, 때문에 고기도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거의 겉에만 익은 수준으로 많이 레어해서 호불호가 갈릴 만도 하지만 필자는 맛있게 먹었다. 함께 시킨 트러플 리조또도 좋았다. 식사를 마치니 리몬첼로를 서비스로 주셨던 기억이 난다.

 피렌체는 관광할 곳들이 그리 멀지 않아 걸어 다니기가 좋다. 여기저기에 있는 성당이나 상점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가죽으로 유명한 지역이니만큼 가죽 제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정말 많았고 그 외에도 여러 필기구들이나 명품 가게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같이 한때 피렌체를 호령했던 메디치 가문의 흔적들도 보인다.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와 돔

 흔히 그냥 '두오모'라고 하는 피렌체의 랜드마크다. 피렌체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Duomo di Firenze) 앞 광장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13세기 말부터 15세기 중순까지 지어진 고딕 스타일의 성당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가 돔을 완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화려한 외관 모습이 꽤 특이하다.

 광장에 그림을 바닥에 두고 파는 듯한 사람들이 있는데, 소문에 따르면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 바닥에 두어서 밟으면 사게 만드는 사기수법이라고 한다. 우연히도 근처에 경찰이 와서 손짓하자 펼쳐뒀던 그림을 주워 떠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다빈치 박물관의 전시물들

 주변의 다빈치 박물관에도 들렀다. 르네상스의 거장 다빈치의 스케치에 나오는 발명품들을 직접 보고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 넓진 않지만 전시물들의 퀄리티가 꽤 좋아서 이과생이라면 아마 미술관보다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천재 다빈치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비행을 꿈꾸어 볼 수 있었다. 아마 문명 6 노래 듣고 가면 더 좋을 것이다.

  피렌체에서는 일부러 현지에서 해 먹으려고 부엌이 있는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마트에서 파스타와 채소, 고기, 소스 등을 사서 파스타 요리 한두 개와 함께 고기를 구워 먹었다. 시판 소스를 써서 그리 대단한 요리를 한 건 아니었지만 재료 손질(특히 마늘 까는 데)에 약간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뭐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남은 재료들을 이용해 파스타를 해 먹었고, 당시 산 페페론치노(고춧가루)는 계속 가지고 다니다가 한국에 가져와 아직까지도 잘 쓰고 있다.

8월 7일

 늦은 아침에 일어나 대충 필요한 재료를 조금 더 사 온 뒤 파스타를 해 먹었다. 여유롭게 걸어 나와숙소 근처에 있던 전통 시장에(피렌체 중앙시장, Mercato Centrale) 먼저 가 봤다. 사실 전날 이곳에 가서 식재료를 사려고 했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가지 못했었다. 실내에 있는 시장인데 생각보다 깔끔했고 다양한 치즈나 고기, 생선 등 먹거리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피렌체 중앙시장 풍경
람프레도토

 시장 안에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 중 하나인 람프레도토(Lampredotto)를 찾았다. 소의 내장을 삶아 빵 사이에 넣어 먹는 음식이다. 식사를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고민했지만 그래도 발견한 김에 먹어봤는데 꽤 괜찮았다. 가죽 공예품 상점이 널린 거리들을 걸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
베키오 궁 외벽의 다양한 문장들 /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

 피렌체 대성당에서 조금만 남쪽으로 걸으면 회전목마와 애플스토어가 있는 레푸블리카 광장이 먼저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이 나온다. 이 광장 바로 앞에는 여러 조각상들과 함께 베키오 궁(Palazzo Vecchio)이 위치한다. 한때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이곳은 현재는 박물관 및 공공 업무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층의 무료로 볼 수 있는 일부 공간만 잠깐 들여다보았다.

베키오 궁 안뜰

 안마당에는 화려한 벽화들과 함께 글귀들이 많이 보였다. 기둥부터 천장, 분수까지 하나하나가 전부 작품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벽화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시들을 그린 것이고, 기둥 위쪽에 보이는 상징들은 교회나 길드들의 것이라고 한다. 건물 안쪽 벽 여기저기에 단테의 글이 붙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궁전 앞에는 조각상들이 많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복제품(원래 원본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이 가장 눈에 띄고, 바로 근처에 야외 미술관처럼 조각상들이 나열되어 있는 곳이 있어 볼 만하다.

 궁전을 나오면 바로 옆에 우피치 미술관 줄이 눈에 띈다. 예약을 오후에 해 놓아서 아직 줄을 서지는 않고, 남쪽 강가로 천천히 내려갔다. 양옆이 우피치 미술관 건물인 이 길에는 단테나 마키아벨리 같은 위인들의 석상을 볼 수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 니콜로 마키아벨리,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 아메리고 베스푸치
베키오 다리와 보석상

 피렌체를 가로질러 흐르는 아르노 강(Fiume Arno)에 놓인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다리 위에 건물들이 놓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귀금속이나 보석을 취급하는 상점들이었다. 우리는 보석 쪽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서 일단 다리를 건너가서 다른 기념품 상점들을 구경했다.

가죽 상점과 이집트-로마 체스

 가죽 제품 가게들도 좋았지만 중간에 체스용품 가게에 들렀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반적인 체스 말은 물론이고 로마군과 이집트군, 십자군과 이슬람 제국,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등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전쟁을 컨셉으로 만든 체스 말들이 재밌었다. 물론 가격은 필자의 지갑 사정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서 구매하지는 못했다. 대신 특이한 기념품샵에서 피렌체 문장 모양의 장식을 구매했다.

점심식사(Cantinetta delle Terme)

 주변 식당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멧돼지 파스타는 생각보다 평범한 맛이었고 전채요리와 게살 파스타는 꽤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문구류 가게나 올리브유 가게 등을 조금 더 구경하다가 미술관으로 향했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Uffizi)

헤라클레스 석관 / 칼리굴라 황제 흉상

 원래 사무실(Uffizi)로 지어졌던 우피치 미술관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 중 하나로 메디치 가문의 미술품 컬렉션들을 보관하고 있다. 예약한 시간에 입장 줄을 서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거쳐 들어갔고, 수많은 방들을 지나 넓고 긴 복도를 걸으며 여러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조토와 두초의 13~14세기 작품들 / 프라 필리포 리피, <성모자와 두 천사>, 1418.

 관람은 대략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 중세 말에 활동했던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의 그림들이 먼저 보이는데, 조토의 작품은 주제는 중세적이나 기법 면에서는 르네상스 예술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조토를 시작으로 하여 점차 중세 미술에서 르네상스 미술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감상해 볼 수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 <봄(프리마베라)>, 1480 /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

 곧이어 우피치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보티첼리 전시실이 이어진다. 보티첼리(Botticelli)는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대표작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 이곳 우피치에 전시되어 있다.

우피치의 핵심 전시실로 사용되었던 트리뷰나(Tribuna). 입장은 불가능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수태고지>, 1472-1476 / 라파엘로 산치오, <도니 부부의 초상>, 1506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도니 톤도>, 1505-1506

 르네상스의 세 거장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림들을 직접 감상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느껴 볼 수 있었다.

렘브란트 판 레인, <자화상> / 카라바조, <메두사의 머리> / 유스투스 서스테르만, <갈릴레이의 초상>

 이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다. 관람 경로 끝쪽에 있는 초상화 컬렉션들이나, 조금은 섬뜩한 그림들이 걸려 있는 카라바조 전시실도 인상 깊게 봤다. 각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도 있다 보니 가이드와 동행하거나 오디오가이드를 사용한다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여기도(바티칸처럼) 생각보다 꽤 관람 동선이 길어서 하나하나 다 감상하기는 힘들 수 있겠다.

 숙소로 돌아오며 가죽 제품 상점에 들러 벨트를 하나 구입했다. 벨트라면 한국에 돌아가서라도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아직 잘 사용하고 있다. 잠시 휴식 후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저녁식사(La Cantinetta)

 해산물 파스타와 피렌체식 스테이크, 크림 리조또를 먹으며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스테이크는 비쌌지만 정말 정말 맛있었다. 밤거리를 걸으며 상점 몇 개를 들렀다가 숙소로 향하며 피렌체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피렌체는 구경할 것이 많으면서 거리도 가깝고, 도시 경관도 아름다워서 관광하기 굉장히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예술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별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날에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가는 기차를 타는 일정이었는데, 기차를 잘못 예매했던 바람에 이날 저녁에 새로 예매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일주일은 대략 이렇게 마무리되며 일주일 정도 뒤에는 일행들 없이 혼자서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된다.